한명련은 황해도의 천민 출신으로 임진왜란 시기 의병에 가담해서 용맹 하나만으로 명성를 쌓고 출세한 인물이었습니다.
당대의 여러 인물들에게 용맹하다고 평가 받았으며
얼마나 용맹했는지 명나라 제독 마귀에게 이순신, 권율 장군과 함께 거론될 정도였습니다.
왜란 이후 종2품 오위장(수도방위군)이 되어 중앙에서 복무할 정도로 출세했지만 천한 출신이란 이유로 견제를 받았습니다.
계속되는 견제에 지쳐버린 전쟁영웅 한명련은 결국 변방으로 가길 청했고, 짧았던 영광을 뒤로한채 변방으로 가게됩니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한명련이 고작 역말을 함부로 탓다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키고 부산으로 유배시켜야 한다는 요청까지 이어졌습니다.
다행히 선조는 한명련을 상당히 총애했기 때문에 유배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목숨걸고 싸웠던 한명련은 정치적 뒷배가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씁쓸한 대접을 받아야했습니다.
이후 한명련은 어머니의 상중에 있었는데 광해군 시기에 역전의 장사로 평가 받으며 다시 기용되었습니다.
광해군 집권기에 안정된 시절을 보내며 순변사로서 군졸들을 잘 보살핀다고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폐위되자 좋은 시절도 끝나버립니다. 한명련은 불안을 느꼈는지 먼저 사직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불안은 맞아떨어졌고, 한명련은 이괄, 정충신과 세트로 묶여서 반역을 모의했다는 혐의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양으로 압송되었지만, 이때 진짜로 반역을 일으킨 이괄이 중간에 한명련을 구출해냈고, 그뒤로 이괄군에 가담해서 2인자로 활동하게됩니다.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폭발한건지 이괄군의 선봉으로 관군을 격파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천민 출신(그것도 같이 권율 휘하에 있었던)이었던 정충신 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이괄과 함께 몰락,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여기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완전히 흑화해서 조선을 엄청나게 증오하게 됩니다.
아버지 한명련이 억울하게 모함받고 이괄의난에 가담해 몰락, 죽은 후 1년간 고향에서 숨어살던 한윤은 포위망이 좁혀오자 사촌동생 한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갑니다.
그리고 그를 받아준 인물이 바로 후금(1636년에 국호 청나라로 바꿈.)의 초대 황제 누르하치였죠.
누르하치에게 유격의 직책(1500명 정도를 통솔)을 받은 한윤은 곧바로 조선 정벌을 주장하지만, 누르하치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선정벌 주장은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칸이 되자, 홍타이지에게 조선침략을 부추겨 현실이 됩니다. 이것이 정묘호란.
한윤은 앞잡이 길잡이 노릇하면서 조선의 의주성을 함락시키는데 앞장섰고, 이 일로 수만의 조선인들이 학살을 당합니다.
이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 장군도 의주성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정묘화약이 이루어진 후 후금군은 철수했지만, 한윤은 계속 조선을 완전히 정벌해야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조선 또한 이가 갈렸는지(조선에서는 한윤을 '한적('韓賊)이라 지칭하며 매국노로 미워했습니다) 후금의 칸 홍타이지에게 한윤을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홍타이지는 이에대해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윤은 위세는 계속 높아져서 후금으로 간지 7년만에 후금(청나라) 공신 서열 50위에 올랐고, 용골대와 사돈을 맺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조선에서조차 한윤을 포섭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죠.
웃기게도 조선 정치판에서 한윤은 조선인들 학살엔 참가 안 했고, 사촌동생 한택이 더 나쁜 놈이었다 하면서 한윤을 옹호하는 발언까지 나올 정도였던..
이후에 한윤은 계속해서 청나라에서 전공을 세웠고 그의 가문은 청나라의 귀족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부분은 명나라의 명장으로 마지막 희망과 같았던 영웅 원숭환이 모함받아 누명씌워 능지형으로 최후를 맞고, 그의 아들 원문필이 청나라로 넘어가 청나라 팔기군에 편입, 청나라 장수로 활약한것과 매우 흡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