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의 진실.jpg란 글의 팩트

430 0 0 2019-12-25 22:58:0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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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 하면 올라오는 가짜뉴스급의 글이 또 올라왔길래 2년전에 제가 썼던 글을 다시 가져 왔습니다


http://www.etoland.co.kr/bbs/board.php?bo_table=etoboard&wr_id=574797


얼마전에 명성황후의 진실이라는 글이 올라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사실로 알고 있더군요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걸 교묘히 섞어서 사실인양 주입시키는걸 사기라고 보통 하죠
해서 잘못 알려진걸 바로 잡아 보고자 글을 써봅니다 긴 글이 될수도 있으니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단 명성황후는 현대의 인물이 아니란걸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현대의 인물이 아니니 지금 사고와 다소 다른 생각을 
가졌을 것이고 유교적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전근대의 인물이니   해당 시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무조건적인 쉴드도 적절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비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당시 조선 후기는 이미 삼정의 문란과 오랜 세도정치 등으로 인해 부정부패가 심했고 국가의 재정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민씨 외척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은 여러 기록으로 남아 있고 현재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입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고종의 친정 이후에 심해졌던 것만은 아니며, 외척의 부정부패를 고스란히 중전 민씨가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왜 이런 외척을 끌어들여 정치를 했느냐면

당시의 상황을 간단히 서술하면 쇄국정책으로인해 기술과 외교의 수준이 주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었습니다
일본은 몇차례의 개혁과 개방을 통해 안정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날이 갈수록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청 역시 내홍은 겪었지만 서구 열강의 힘을 받아 들여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전혀 아니었죠
더군다나 경제는 당시 조선에 통영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이 약 1000만냥 정도였는데 760만냥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쏟아붓습니다
당장 그만한 돈을 구할길이 없자 당백전이라는 새로운 돈을 찍어내서 조달을 하죠 2년 동안 1600만냥을 찍어냈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바로 폐지해버립니다 경제 또한 엄청나게 어려워진건 말할 필요가 없겠죠

이런 상황에 고종이 친정할 나이가 되었지만 대원군이 순순히 내어 줄리가 없죠 

꼭두각시가 되어서 인플레로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쇄국으로 점점 퇴보해가는 나라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누구의 손인들 빌리지 않을까요
딱 한군데 민씨외척밖에 도와줄 곳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민자영이 고종의 왕비로 간택된 것도 딱히 정치적세력이 없어서
대원군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해 간택된 것이니까요


개혁과 개방에 뜻이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정치 세력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외척세력을  조정에 들여와 대원군과 세력 싸움을 벌이게 되고 
이 과정에서 명분이 약한 대원군 세력이 실각하게 됩니다

외척의 정계진출은 어쩌면 당연시 될 수 밖에 없었을듯 합니다 그 외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유생들은..
아시다시피 외국 문물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청에 대한 사대만을 강조하던 세력이었으니...
해서 고종때가 일반인의 정계 진출이 가장 활발했었습니다

요약 : 고종과 명성황후 친정 이전 흥선대원군때 당백전 발행으로 인플레이션 발생 - 경제 파탄
       쇄국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퇴보돼 가는 국가 상황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방과 개혁에 뜻이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가져오기 위해 정치세력이 필요했음         - 유일한 세력이 외척세력


사치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한 기록은 딱 한군데   황현선생이 쓴 매천야록 에만    나옵니다 

이 책은 황현 전남 구례에 칩거 해 있으면서 소문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적어 놓은 책입니다
원본은 현재 구례에 보관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소실된 상황 이며 그마저도 고쳐 쓴 흔적 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매천야록은 황현의 아들이 필사했다고 전해지는 부본으로 많은 수가 있었지만 거의 다 소실되고
일제가 조선의 역사왜곡을 위해 설치한 조선사편수회 가 1930년쯤 입수해 가지고 있다가 일제 총독부에 헌납 , 이것이 국사편찬위원회로
넘어가 데이터베이스화 한것이 현재 남아 있는 매천야록 입니다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으론 다들 아시는 이름 이완용 등이 있었지요

적혀 있는 내용이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이 아닌걸로 밝혀진 내용도 많고 허무맹랑한 내용도 많이 적혀있어 
그 내용의 신뢰성은 많이 떨어집니다
관료인 누구와 누가 게이관계 였다거나 누구는 고자라 부인이 바람을 피웠다거나는 등의 내용도 있는 등 시장에 떠도는 야사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는 일본이 감독하고 편찬했던 고종실록, 순종실록에도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을미사변으로 중전 민씨를 살해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한데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고종을 무능력한 군주로 묘사해 사실을 왜곡해 기록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 사치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검소하고 장신구등을 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는 기록은 매우 많고 해외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요약 : 매천야록 - 일제가 만든 친일기관에서 입수해서 가지고 있었음, 고쳐 쓴 흔적이 매우 많은 기록으로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함

동학농민운동과 임오군란은 뒤에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원군이 쌓은 국부..앞에 설명해 드렸으니 생략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매천야록의 신뢰성 또한 여기서만 봐도 매우 떨어지는걸 알 수 있죠

유길준...

민영익의 추천으로 조사시찰단에 합류 고종의 비자금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인물입니다
일본으로부터 돈을 빌려 경제 개발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으나 고종이 거절한 적이 있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실상개화를 주장하다가 후에 대원군파로 전향한 인물 입니다

일본군에 의해 민씨 외척이 물러나고 대원군 앞세워 신정권이 수립 됐을때 외무참의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원군 세력이 장악한 군국기무처 일본의 견제 로 고종이 한가지의 일도 단독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되자 중전 민씨가 러시아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고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군과 대원군파와 함께 중전 민씨의 암살을 계획하고 을미사변에 도움 을 줍니다
후에 을미사적으로 지목 당하기도 했죠

이후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 폴란드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사악한 여성이라고 했으며 
그 근거로 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가 그 인형을 가지고 논다는 소문이 있다란 논리를 내세워 주장했습니다
명성황후 암살사건 이후 친일 내각에 의해 내부대신 서리에 임명 되었었고
고종의 아관파천을 미리 알아내 왕이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 했지만 결국 아관파천이 이뤄지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 을 갑니다
이토 히로부미 가 죽자 그 추도회 를 전국적으로 열기도 했었던 사실도 있군요
이 정도면 어떤 사람인지 저런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대충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한일합병에 반대하며 조선을 먼저 생각한 개화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만...그 아들과 일가친척들은 거물급 친일파로 성장했죠

요약 : 유길준은...일본과 매우 친밀한 인물,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



알렌 은 미국인입니다 미국인 선교사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왔지만 선교보단 의학을 전파하고 미국과 조선사이에서 외교관 역할 을 했던 인물입니다
10만냥은 광혜원 건립에 사용 됩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최초의서양병원으로 의학당도 만들어져 학생들이 서양의학을 공부 할 수 있었고 언더우드 등이 들어오는 계기가 됩니다
광혜원이 제중원이 되고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가 연세대학교 가 되죠

마치 10만냥이 세금을 맘대로 주어 낭비하게 했다는 인상으로 말하는데..사실이 아닙니다
제중원의 소속 은 당시 국가소속 그것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즉 외교부 소속 이었습니다 알렌이 그냥 의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죠

그밖에도 고종의 비자금은 수많은 곳에 쓰였는데 전기 철도 부설, 전화국 설치, 유생들의 유학자금에도 쓰였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에도 쓰이고, 독립군의 자금으로도 막대한 양이 들어가는등 많이 쓰였습니다

비자금이라 하면 지금은 굉장히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고종의 비자금은 자신의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아래 국채보상 관련 글을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요약 : 10만냥은 알렌에 의해 광혜원 건립에 사용, 광혜원은 건립 후 당시 외교부에 소속, 지금의 연세대학교



민형식의 70만냥에 대한 기록은 아무리 찾아도 그 출처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 어떤 사료가 출처인지 찾아도 나오질 않는군요
다만 당시의 민씨일가는 인형왕후의 일가로 오래전부터 명망 높은 가문이었고 돈도 많았습니다 
저 금액은 일년에 70만냥씩 가져갔다는게 아니고   70만냥을 민형식이 가지고 있더라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 같은데..출처는 모르겠군요
70만냥이면 위에 짤에서 10만냥이 50억이라고 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약 350억 가량이겠네요

현재의 국가예산에 대입해서 50조원이라고 하는건 말도 안되는 비유입니다..
망해가는 나라의 재정과 현재의 재정을 같은 100%로 보고 비교를 한다니...저런게 조작이고 선동이죠
만약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일궈낸 재산이라면 까여야 마땅합니다

허나 외척세력의 일을 온전히 중전 민씨만의 책임으로 돌리는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대표적인 잘못된 선동입니다 명성황후 사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식적인 판명 이 났습니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습니다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경군이 파견 됩니다 무장은 독일제 소총에 야포, 기관총까지 있었죠 
화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만 운용방법이나 전술에서 너무나 미비해서 진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쇄국정책으로 외국 문물을
늦게 받아들여 신식 무기를 도입했음에도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러시아에 군사훈련장교를 파견요청 하는 일의 원인이 되죠

그리고 외국군대를 끌여들여 자국민은 학살했다는 부분은...동학농민군을 스스로 진압하지 못해서 청에 군대를 요청합니다만 이들에게 
동학농민군을 몰살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제물포를 통해 청 군대를 주둔시키곤 이를 협상카드로 사용해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해산을 유도하였고 결국 해산에 응하게 되었죠

이후 청나라 군대는 얌전히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톈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일본군은 돌아가려 하지 않고 프랑스와 영국의 회유에도 오히려   청나라 군대에게 조선을 나누자는 제안을 하고 이를 청나라가 거부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겁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대에 파견을 요청해서 일본군이 들어왔으니 명성황후 잘못이다?

아니죠 대한제국과 청나라, 프랑스, 영국 등이 돌아가라고 요청해도 돌아가지 않고 대한제국을 분할해 삼키려한 일본의 행동이 잘못된거죠


이 과정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정을 장악하자 동학농민군이 외세를 무찌르자며 다시 일어난 것이고요
물론 자국의 난을 스스로 해결 못한 한계가 있습니다만 명성황후가 자국민은 학살하고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고 했던게 아닙니다

부족한 군사력에 부족한 기술력이 더해져 주변 열강의 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교책이었고 생각보다 일본군이 강했기에 일어난 일이죠

당시 청나라는 오랜 사대를 통해 조선과 가까운 사이였고 식민지화할 생각이 없었고, 
러시아 또한 러시아제국 황실과 서신을 자주 주고 받으면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일본에 대항하려면 청,러를 포함한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스스로 진압하지 못한 점을 비판한다면 온전하겠지만 왜곡하면서 결과론만으로 평가하는건 온전한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최근 2008년 임오유월일기라는 역사 기록물이 발견 되었습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군사적 요청을 하는 등의 정치적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과 정면 대치되는 내용이 실려 있어 더더욱 이 부분에서는 명성황후를 깔 이유가 없는게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요약 : 쇄국정책으로 발달하지 못한 군대를 보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나라에 군대 요청 

       청나라와 일본이 자기들 맘대로 맺은 톈진조약으로 일본군 주둔 

       힘이 없기에 외교적 해법으로 대처했으나 여러 나라와 대한제국의 요청에도 일본군은 침략의 야욕을 들어내고 자국으로 돌아         가지 않음 






이것도 대표적인 중전 민씨를 까는 내용중에 하나죠
몇번을 말씀 드렸지만 당시 조선은 재정이 궁핍한 나라였습니다 국가 수입의 1/3을 차관등으로 충당하는 상황이었죠 해서 알렌을 통해
평안도 일대의 광산을 담보로 차관을 빌려오려고 했습니다 운산금광을 예로 들자면 이전에 60년 가까이 금을 채굴해 왔던 곳 입니다 

결국 알렌의 중재로 미국의 모스에게 팔리고 주식회사를 설립해 운산금광 주식의 1/4을 조정이 가지게 됐죠 이들이 제일 처음 한 것이 전기를 통한 채굴이었는데 이를 위해 수력발전소를 짓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전기란 없다시피 했던 기술이고 뛰어난 기술력을 통해서 미국은 막대한 양의 금을 채굴한겁니다 

저 금광을 잘 운영했으면 국채보상운동이 없었을 것이라고요? 

국채보상운동의 원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억지주장입니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에게 어업권을 뺏기고 철도부설권 뺏기다시피 하던 조선이 저 금광을 잘도 지켰겠네요 일본이 그걸 가만 놔뒀을까요 
실제 미국에서 제일 처음 운산금광을 개발할때 채굴권을 다른 나라에서 뺏어갈거라고 말해주면서 조선에서 스스로 개발해보라고 제안했지만 그런 기술력이 있을 턱이 있나요..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왜곡을 하다하다 저런 지경까지..
우리가 얼마의 돈이 있건 그보다 많은 양의  차관을 억지로 하게 만들어서 빚더미에 앉히게 했을 일본 입니다  
조선 정부가 무분별하게 돈을 써서 빚이 늘어난게 아니고 일본정부가 조정을 친일파로 장악하고 필요없는 차관을 강제로 발행하게 하여서 생긴 일입니다

고종시대 국가재정 연구라는 논문 에 따르면 1900년쯤 한국의 일년 세입이 500만엔 정도였는데 같은 시기 일본은 3억만엔 정도가 세입으로 들어왔습니다 비교할 짬이 아니죠
경제로 잠식하는건 친일파 덕분에 일도 아닙니다 이로 인해서 고종에겐 비자금이 필요했던 것이고요


요약 : 운산금광은 60년간 채굴해온 금광, 기술력의 부족으로 채굴에 한계가 있었음

       그냥 놔뒀으면 일본에 빼았겼을것이 자명




매천야록 입니다 위에 설명했으니 그 신뢰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선은 성+비 라는 조합을 폐위된 왕비일때 딱 한군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성+비의 조합으로 왕비를 부르죠

매천야록의 부본은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는 사료라는건 이미 위에 설명해 드렸고 이 매천야록에서도 민비라는 호칭은 딱 한번 나옵니다
이걸로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불렀었다? 
황현은 황희정승의 후손으로 유학자 집안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집안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죠
말년에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자 이를 한탄하며 자결할만큼 꼿꼿한 선비였습니다

근데 예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조선 왕실의 작명에 관한 법도를 저버리고 민비라고 불렀다고요?
매천야록에서 명성황후를 비판하는 주 내용이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아니라 왕이 살아 있는데 여자가 정치를 한다는 내용이었을만큼 유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던 선비가요?

일본이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불렀던 기록은 있습니다 1910년 9월 매일신보에서 처음 언급합니다 그리고 1920년 7월에 매일신보에서 
일본 궁서성이 명성황후로 승격하기로 결정했다는 신문보도가 나옵니다 그동안은 격하시켜서 민비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죠

머 민비라고 하든 중전 민씨라고 하든 명성황후라고 하든 일반인이 머라고 부르든 그게 머가 문제겠습니까 
대통령도 쥐라고도 하고 닭이라고도 하는데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다만 호칭이 맞냐 틀리냐라고 하는 문제로 간다면 일본식 호칭을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틀린게 됩니다 따라서 민비라는 호칭은 잘못된 것 이고
고종을 고종이라고 부른다면 그 부인인 중전 민씨도 명성황후로 불러야 우리의 예법에 맞는 겁니다
인물의 해석이 다르니 정 격하시키고 싶다면 중전 민씨, 중궁 민씨 왕후 등으로 부르는게 맞습니다

명성황후는 외척세력을 중용했다는 점이나 권력욕에 대한 비판 등은 한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세도 정치가 다시 생겨나고 부정과 부패를 민씨 일가가 저지르긴 했지만 이전에 없었던 부정부패가 생겨난것도 아니고 대원군과 척화파에서 민씨일가로 권력의 이동만 있었을뿐 다른건 없습니다
그전에도 부정부패는 심했고 매관매직은 성행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명성황후가 까이려면 대원군은 더 혹독하게 까여야 하고 그 이전의 세도가들은 더더운 까여야 마땅하죠

대원군은 자신이 정권을 다시 잡기위해 임오군란의 난 주동자들을 이용했고 동학농민운동의 전봉준과 남접을 이용했으며 후엔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이용했으니까요

한계가 분명하기 하지만 그렇다고 저 뉴라이트 교과서에서  부르는 것처럼 민비라고 불리면서 저평가 될 사람 또한 아닙니다 
망해가는 왕조의 끝물에서 힘 없는 나라를 끌고 열강들의 틈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던 사람이고 고종의 참모였으며, 일본 낭인 50여명에게 강간 당하고 무참하게 죽어간 우리 역사의 황후입니다

우리의 근대사라는게 부끄러운 것도 많아 잘 연구되지도 않고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지만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해서 스스로가 역사를 
부끄러워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사적 인물을 바라볼때는 무조건적인 찬양도 필요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비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감안하는 것 또한 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는 이런 왜곡된 이야기들이 사실인양 돌아 다니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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