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회사 다니면서 호러와 미스터리 소설을 짬짬이 쓰고 있는 허아른이라고 합니다.
올해 6월쯤에는 <돌림판 작가 허아른의 소설 분투기>라는 2권짜리 초단편 소설집을 출간했고요,
요즘은 <이루길 허아른의 괴담수첩>이라는 소설을 창작의 날씨에서 연재하고 있어요.
<이루길과 허아른의 괴담수첩>은 괴담과 도시전설 뒤에 숨은 진실을 추적하는 전형적인 탐정 소설이랍니다,
호러 미스터리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얼추 맞을 거예요.
1화 내용을 올려 놓을게요. 관심 있으시면 꼭 방문해주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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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TV를 사랑한 소녀
세상의 모든 괴담, 여기는 실괴소녀TV입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가 얼굴을 드러내고 영상을 찍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요,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서 좀 떨리기도 하지만 너무 반갑네요. 사실 오늘은 특별히 기념할 만한 날이라서 이렇게 깜짝 영상을 찍어봤습니다.
저희 채널이 지난 해부터 독자 투고 콘텐츠를 시작한 거 다들 기억하시죠? 구독자 여러분이 직접 체험한 실화 괴담 사연을 투고 받아서, 영상으로 만들어 올려드렸는데요, 그렇게 만든 독자 투고 콘텐츠가 드디어 100개나 모였습니다! 너무 감사드려요.
투고 영상을 하나 올릴 때마다, 괴담이 채택되신 구독자분들께 감사의 선물을 보내드렸죠. 대단한 건 아니고 20만 원 상당의 FHD TV를 모든 분께 보내드렸어요. 받으신 분들 모두 댓글로 아주 잘 쓰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인증사진을 올려주신 분들도 많이 있었고요. 보내드린 선물을 잘 간직해 주셔서 실괴소녀도 정말 기쁘답니다.
자, 그런데 괴담 채널에서 구독자 선물이 왜 하필 TV냐, 저주받은 TV라도 되는 거 아니냐. 전원 켜면 화면에서 사다코가 나오는 거 아니냐 등등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거나 궁금해하신 분이 많았거든요. 오늘은 이 기회에 그 질문에 대답해 드릴까 해요.
사실 보내드린 TV에는 제 특별한 추억이 담겨 있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TV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한번 TV 앞에 붙으면 엄마가 끌고 나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죠. 그 당시에는 TV가 그렇게 크진 않았잖아요. 맞아요. 브라운관 TV. 지금은 대형 TV라고 하면 보통 60인치니 70인치니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엔 30인치만 되어도 큰 편이었으니까요. 대신에 앞뒤로 엄청 두꺼워서 무슨 박스처럼 생겼었죠? 되게 무겁고.
맞아, 옛날에 그런 얘기도 있었잖아요. 애기들이 TV에서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걸 보고 껴안으려고 하다가 TV에 깔리는 사고 같은 거 있었죠? 가끔 뉴스에서 나오곤 했는데, 기억하시나요? 아 참, 너무 어린 분들은 잘 모르려나요?
하여간 우리 집 TV도 꽤 큰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만큼 크니까 오히려 어린이 힘으로는 꿈쩍도 안 하는 무게라서요, 사고 날 걱정은 없었어요. 어렸을 때는 매일 그 30인치 TV 앞에서 거의 먹고 자고 하다시피 했던 거 같아요. 그 나이 때 애들이 대개 그렇지만, 전 좀 더 심했죠.
그런데 우리 집엔 저보다 더 TV에 푹 빠진 사람이 있었어요. 제 쌍둥이 동생이요. 아, 일란성 쌍둥이 맞아요. 저랑 진짜 똑같이 생겼어요. 왜 쌍둥이들이 똑같이 머리를 하거나 옷을 바꿔 입거나 하고 “누구게~”하는 그런 놀이하는 거, 만화 같은 데서 보신 적 있죠? 저희도 가끔 그러고 놀았는데, 진짜 다들 속더라고요. 엄마만 빼고.
엄마는 저랑 동생을 흘낏 보기만 해도 구분할 수 있었어요. 누구게 놀이를 할 때 말고도, 그냥 일상생활에서 엄마가 행동하는 것만 봐도 우리 둘을 확실히 구분한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동생에게 주어야 할 것, 제게 주어야 할 것을 구분해서 주거나, 동생에게 시킬 일과 제게 시킬 일을 구분해서 시키거나 할 때, 그럴 때 한치도 망설이지 않았거든요. 물론 나이가 들고나니까 오히려 잘못 알아보시는 일이 많아졌지만.
어쨌든 제 동생은 정말 TV를 엄청 좋아했어요. 아마 우리 집 TV가 조금만 더 가벼웠어도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요. TV를 껴안는 일 정도는 예사였고, TV 속 캐릭터와 대화를 시도할 정도였으니까요. 같이 TV를 보다가도 동생이 너무 집중했다 싶으면 일어나서 제가 TV를 끄기도 했어요. 쌍둥이라서 사실 언니 동생이라는 구분이 웃기긴 하지만, 당시엔 내가 언니니까, 하는 책임감이 나름 있었거든요. 언니가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고, 엄마가 저한테 항상 신신당부하기도 했고요.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닌데, 생긴 것도 나이도 똑같은데, 그런데도 언니랍시고 으쓱하는 마음이 제겐 분명히 있었어요. 동생을 마치 한참 어린,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했고요. 웃긴 게, 동생도 저를 깍듯이 언니 대접을 하고 그랬단 말이죠.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꼭 물어보고. 물론 그 애가 궁금해하는 건 대부분 TV 프로그램이나 TV 기계에 대한 거였어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대답하곤 했죠. 언젠가는,
"언니, 저 TV 속에는 작은 사람들이 들어 있는 거야?"
"그럼. 작은 사람들이 TV 속에서 연기를 하고 있지."
"그럼 작은 사람들은 거기서 살아?"
"아니야, 우리가 잘 때 TV에서 나와서 집에 갈 걸? 그래서 밤에는 방송을 안 하잖아."
"작은 사람들은 그럼 작은 집에서 살아?"
"아니야, 그냥 큰 집에서 살아. 작은 사람들은 그냥 TV에 들어갈 때만 작아지는 거야."
"어떻게 작아져?"
"...그냥 TV에 들어가면 작아져. 이제 질문 끝!"
사실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지면 대답할 말이 궁색할 것 같았어요. 동생은 아직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더 묻지 않았죠. 그런데 왜, TV라고 하면 유치원에서 이런 노래 많이 불렀었죠?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지금도 부르나요? 동요라는 건 어린이의 보편적인 정서를 반영하는 거잖아요. 그 나이 때는 정말로 텔레비전에 나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이라면 유튜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말했죠? 동생은 저보다 더하다고. 동생의 그 욕망은, 보편적인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날은 아마도 엄마랑 저랑 둘이서 어딘가 다녀왔던 것 같아요. 아마 시장이었거나 마트였거나 그랬겠죠. 내 손에 동생과 내 몫의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으니까요. 현관을 열고 신나서 들어오는데, 마른오징어가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가스레인지라도 켜두고 나갔었나 하고 후다닥 들어가긴 했지만, 냄새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어요. 브라운관 TV였죠. 앞 유리가 다 깨지고 치직치직하며 스파크가 튀고 있었어요. 옆에는 망치가 굴러다니고 있었고요.
네, 동생이 한 짓이 틀림없었어요. 동생은 그 깨진 TV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까맣게 타 죽어있었거든요. 작은 두 팔로 텔레비전을 껴안은 채로요. 그건 마치 뭐랄까요. 사람의 몸에 머리만 텔레비전인 괴물이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절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기괴한 상황이지만 저는 금방 이해했어요. 아, 동생은 텔레비전에 들어가려고 했던 거구나.
그 후에 시신이 어떻게 수습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동생이 죽었다는 건 이해했지만,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냥 동생이 없어졌고, TV가 새 걸로 바뀌었다… 그 정도의 기분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동생이 죽고 얼마 후에 일어난 일인데요, 자다가 가위에 눌렸거든요. 눈을 떴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 제가 뭘 봤는지 아세요? 세상에, 몸은 사람인데 머리만 텔레비전인 사람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너무나도 커다래 보였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고요. 한참을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가, 그대로 까무러쳤어요.
엄마는 동생의 죽음을 견뎌내지 못한 것 같았어요. 한동안은 울고, 소리치고 하는 소리가 매일 집에서 들려왔죠.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큰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엄마의 손가락에 반지가 없었거든요. 그동안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던 반지가요. 그 후로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조금 크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죠. 아, 그게 이혼이라는 거구나.
나이를 더 먹어 학교에 들어가고, 조금씩 세상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죠. 그 나이 때는 오늘과 내일, 일주일 전과 일주일 후의 성장이 다르잖아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러면서 동생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에 대해서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죠. 머리가 커질수록, 죄책감이라는 덩어리가 커져갔어요. 아주 검고, 답답한 안개 같은 그것은 점점 제 머리를 둘러싸기 시작했죠. 그러다, 꿈을 꾸었어요. 꿈속에서 머리가 텔레비전이 되어버린 동생이 귀를 막은 채 제 눈을 바라보는 꿈.
그 꿈속에서는, 제 머리도 텔레비전이 되어 있었어요. 저도 동생과 똑같이 귀를 막은 채, 동생을 마주 보고 있었죠. 나는 그동안 좀 컸고, 동생은 여전히 작았죠. 동생은 제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어요. 귀를 막고 있었으니까요. 그게, 손을 놓으면 텔레비전이 떨어져 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 꿈은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어요. 매일 꾼 건 아니지만, 계속되었죠. 처음엔 무서웠는데 익숙해지더군요. 꿈이 거듭될수록 죄책감은 흐려지고, 나중엔 악몽이라기보다 아름다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점점, 그 꿈속에서 동생이 제게 하려던 말이 뭔지 궁금해졌죠.
어른이 되고 나서 바뀐 게 또 하나 있어요. 엄마를 만난 거요. 겨우 찾아냈어요. 20년 넘는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마는 많이 늙었더라고요.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어요. 저를 가끔 동생으로 착각하기도 했고요. 그럴 때면 굉장히 행복해 보이고, 위안을 받은 것처럼 보였죠. 그러다 제가 동생이 아니라 언니 쪽이라는 걸 깨달으면, 엄마는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어요. 슬픔, 낙심, 그리고 그 안쪽에 작게 피어나는...분노. 알고 있었구나. 엄마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엄마가 절 동생으로 착각하면 동생인 척 애교를 떨고,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땐 그런대로... 그렇게 자주 찾아가는 동안, 동생인 나도, 언니인 나도 엄마와 많이 친해졌어요. 엄마에게 이 유튜브 채널도 보여주었죠. 엄마는 채널을 보더니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 예쁜이가 TV에 나오네."
단박에 알았어요. 동생 쪽을 이야기하고 있다는걸요. 그리고 동생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죠. TV, TV에 대한 질문들. 그리고 동생의 마지막 말.
어떻게 작아져?
아아, 그래요. 꿈속의 동생은 계속 내게 묻고 있었던 거예요. 언니, 이다음엔? 이다음엔 어떻게 해야 해? 그 아이는 완벽하게 TV에 들어가지 못했으니까요.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남은 한 줌의 죄책감이 말끔히 씻겨나가고 새로운 감정이 가슴에 들어찼어요. 그것은 책임감, 동생의 죽음 이후 잊고 살았던 언니로서의 책임감이었죠. 이제는 어른이 된 언니로서의.
그래서, 100개의 TV를 샀어요. 브라운관이 아닌 게 아쉽긴 했지만, 안 그래도 작았던 동생의 몸은 땅속에서 더 작아졌기 때문에 괜찮았어요. 꺼냈을 땐 고작 10kg도 안 되는 무게였으니까요.
어떻게 작아져?
작게, 작게 자르면 돼. 그래서 여기저기에. 손도, 머리도, 발도 텔레비전에. 수많은 텔레비전 속에 들어가는 거야.
그래요, 그건 공양 같은 게 아니었어요. 동생의 꿈을 이루어 준다? 아니죠, 동생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준다는 것에 가까웠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그 100개의 TV가 하나하나 모두 살아있기를 원했어요. 동생이 살아가는 그곳들이 단순히 TV로 쓸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활동하는 TV이기를.
아마 지난주였을 거예요. 동생의 마지막 손가락을 집어넣던 참이었죠. 그 손가락을 보다가, 저는 깨달았어요. 아아,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저는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동생을 제대로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늘 이야기는 재미있었나요? 다음 주 오늘은 엄마 생일이에요. 그래서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됩니다. 채널 사상 보여드린 적이 없는 역대급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기다려 주세요. 구독, 좋아요, 댓글, 알림 설정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라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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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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