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아직 지평선 너머였으나 그 존재는 이미 회색 장막을 통해 암시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순간.
알라릭은 창을 땅에 꽂고 자신의 검을 꺼내어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검은 무딘 빛을 내뿜었다.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에게 남겨주었고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세 세대에 걸친 피의 기억이 스며든 강철.
안개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울포가 다가오고 있었다. 울포는 그의 형제는 아니었지만 혈족보다 더 가까웠다. 함께 자랐고 함께 싸웠다. 서고트의 전사들.
오늘은 피의 날이 될 것이다. 울포가 말했다.
알라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으로 공기를 한 번 가르고는 다시 칼집에 넣었다. 멀리서 탐붕소리가 들려왔다. 훈족의 북이었다. 적들은 이미 깨어 있었다.
테오도릭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 거지. 알라릭이 물었다.
울포는 침을 뱉었다. 영광으로 혹은 죽음으로.
알라릭은 다시 동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비치는 수천 개의 불빛들. 훈족의 진영이었다. 아틸라의 호드는 마치 메뚜기떼처럼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릭 왕은 그렇지 않았다. 늙은 왕은 로마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 이국땅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들어봐. 울포가 말했다.
알라릭은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들었다. 낮은 진동. 수천 명의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이는 소리. 말들이 고동치는 소리. 금속이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 전쟁의 소리였다.
오늘 우리는 신에게 가까워질 테지. 울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열정이 스며 있었다. 그는 항상 전투를 축제처럼 대했다. 삶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의 죽음.
너의 신이 이 광기 속에 있다고 생각하나. 알라릭이 물었다.
울포는 웃었다. 신들은 항상 피를 원해왔어. 우리가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바뀌었을까?
알라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걸려 있는 작은 십자가를 만졌다. 나무로 된 소박한 것. 그의 어머니가 죽기 전에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그를 보호할 수 있을지 한사코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니고 다녔다. 어쩌면 신이 그를 위해 계획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남자는 남은 달빛 아래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들 주위로 다른 전사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일부는 기도를 중얼거렸고 일부는 무기를 점검했다.
***
태양이 떠오를 때 알라릭은 이미 진영을 떠나 전투 대형에 합류해 있었다. 서고트 전사들이 둥근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전선을 형성했다. 그들 앞에는 로마의 군단이 있었다. 고대의 적이 이제는 동맹이 되어 함께 더 흉포한 마물과 맞서고 있었다.
그들 너머로 먼지 구름이 일었다. 훈족의 기병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태양빛 아래 검은 위협으로 다가오는 점들. 알라릭은 그의 보호용 투구 속에서 침을 삼켰다. 그의 방패가 땀으로 젖은 손바닥에서 미끌댔다. 울포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저 악마들이 온다. 누군가가 요란하고도 엉성하게 선언했다.
알라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지 구름 너머를 보려고 했다. 그는 훈족을 본 적이 없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들은 말과 한 몸이 되어 싸운다고 했다. 그들의 활은 자신들의 키보다 높았고 화살은 갑옷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외모는 인간보다는 악마에 가깝다고 했다.
먼지 구름 속에서 처음 기마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기이하게 작았다. 말은 역시 작았지만 빨랐다. 기수들은 바람처럼 앞뒤로 흩어졌다. 말들은 방향없이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적을 혼란스럽게 하고 공격할 지점을 숨기기 위한 교활한 술수임에 틀림없었다.
테오도릭 왕이 그들 사이로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의 흰 수염은 가슴 앞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전사들은 기운을 얻었다. 알라릭은 등을 곧게 폈다.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 울포가 말했다.
알라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족의 기병대는 이제 반원을 그리며 그들의 양 측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둘러싸일 것이다. 그런 다음 학살이 시작될 것이다.
아에티우스가 무슨 계획인지 알아? 알라릭이 물었다.
로마인에게 계획을 맡길 건가.
울포는 그 어떤 로마인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로마와의 충돌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고트의 나팔. 공격 신호였다. 전사들이 앞으로 움직였다. 알라릭은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의 발은 이제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운명의 흐름에 휩쓸려 있었다.
***
혼란. 피. 분노. 공포. 전투. 금속 냄새. 피와 배설물과 죽음의 냄새. 공기를 찢는 비명. 방패에 부딪히는 도끼. 살을 찢는 검. 해는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였지만 알라릭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한 광기의 춤 속에서 그는 단지 본능을 따를 뿐이었다.
첫 번째 훈족 기수가 그에게 닿았을 때 그는 거의 죽을 뻔했다. 화살이 마치 머나먼 과거로 사라지는 것 같이 그를 지나쳤고 화살이 가른 바람이 뺨을 호렸다. 다음 순간 기수는 그 위로 있었고 칼을 휘둘렀다. 알라릭은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고 충격으로 휘청거렸다. 그의 팔이 후들렸고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그의 검은 살을 찾아 나아갔다. 그는 말의 다리를 베었고 그것은 쓰러졌다. 기수는 땅에 굴러떨어졌고 알라릭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검은 관통했고 피가 튀었다.
어린 시절 그는 양치기가 되기를 원했다. 조용한 시간을 들판에서 보내고 여름마다 산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전사였고 그도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여기 있었다. 처음 보는 땅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울포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훈족 하나를 방패로 쳐서 땅에 눕히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악마라 해도 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그들도 피를 흘렸다. 그들도 죽었다.
알라릭 뒤로! 울포가 고함쳤다.
알라릭은 돌아섰고 그의 방패가 화살의 충격을 받았다. 화살은 방패의 나무를 뚫고 거의 그의 어깨까지 도달했다. 훈족의 화살은 갑옷을 뚫는다. 그는 쓰러지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것을 보았다. 방패를 뚫고 사슬 갑옷을 뚫고 살을 뚫는 화살들.
알라릭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먼지와 피에 뒤덮인 땅에 가까이. 그는 엎드린 시체들 뒤에 방패를 세워놓고 숨을 골랐다. 그의 가슴은 타오르는 것 같았고 땀은 눈을 따갑게 했다. 평생 싸워왔던 것 같았지만 태양의 위치로 보아 정오가 겨우 지난 시간이었다. 푸른 하늘이 그 위로 펼쳐져 있었다. 몇 마리의 새들이 멀리서 원을 그렸다.
일어나라! 음성이 들렸다.
알라릭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도릭 왕이었다. 노인은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묻은 검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환영 같았다. 고대의 신화가 그의 앞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금은 숨을 시간이 아니다. 왕이 말했다. 죽음에 직면하라 아들아.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왕은 그 말을 하자마자 앞으로 달려갔다. 전투의 소용돌이로 다시. 알라릭은 한 순간 그대로 있었다. 그런 다음 일어섰다. 알라릭은 그의 검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시 한 번 전투 속으로 달려들었다.
***
날이 기울었다. 해는 서쪽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세계를 붉게 물들이며. 마치 대지가 흘린 모든 피를 반영하는 것처럼. 알라릭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그의 몸은 상처와 타박상으로 덮여 있었지만 살아있었다.
훈족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다음에는 명백하게. 그들은 말을 돌려 사라졌다. 먼지 구름 속으로. 그들이 온 곳으로.
우리가 이겼나? 알라릭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시체 위에 서 있었다. 서고트 로마인 훈족 모두 붉은 피를 흘리며 바람 없는 하늘 아래 제각각 누워있었다. 서고트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들은 승리를 선언하고 있었다. 왜 아직 훈족의 절반도 죽이지 못했는데? 그러나 그때 아틸라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는 울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울포는 땅에 누워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알라릭은 달려가서 울포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마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구멍이 있었다. 활에서 나온 화살이 만든 구멍에서는 가뭄에 시든 새싹처럼 피가 흘렀다. 알라릭은 울포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이미 차가웠다.
태양은 사라져 가고 있었고 추위가 찾아왔다. 알라릭은 울포의 시체 곁에 앉아 그날의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에워쌌다. 밤이 전장에 내려앉았고 별들이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 좀좀이 뚫린 구멍으로 누군가 엿보려는 것 같았다.
알라릭은 서서히 일어섰다. 그는 발길을 돌려 불빛이 보이는 진영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의 부름. 알라릭은 그의 검을 옆구리에 찼고 칼집 안에서 그것이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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