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1346 -전쟁단편소설

174 0 0 2025-06-01 16:26: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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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 Chevauchée

해안이 검은 연기 속에서 떨었다.토마스 오브 요크. 그는 저녁 밀밭에 불을 놓고 활시위를 건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교회 지붕을 핥는다. 종소리는 없다. 종은 이미 녹슬어 쓰러졌다.그는 아직 농노의 등뼈를 가진 사내. 왕과 귀족의 전쟁이라 했으나 그에게 전쟁은 허기와 같다. 그는 허기를 채우듯 창고를 턴다. 밀 자루가 찢겨 흐른다. 닭이 울며 도망친다.해안 도로. 시체와 꿀꺽 삼킨 연기가 짙다. 나무 창틀에 항해 깃발이 걸리고, 먼 곳에서 노르만 말씨로 울부짖는 백성. 토마스는 듣지 못한다. 귀에 바람과 불꽃이 울린다.밤. 잉글랜드 군막 사이로 말뚝이 박힌다. 토마스는 칼을 갈지 않는다. 활줄이 칼보다 길고 차갑기 때문이다. 새 도구가 낡은 놋칼을 대신한다.그는 별빛 없는 하늘을 본다. 불길은 하늘보다 밝다. 그는 생각한다. 땅은 누구 것인가. 불에 타는 땅에는 주인이 없다.

Part II | Kings and Beggars

파리에서 아미앵에 이르는 돌길.에티엔 드 보베. 은빛 격자 투구가 더러움에 얼룩진다. 파리 궁정 계단 위에서 그는 무릎 꿇은 상인을 본다. 상인은 전장에서 피가 얼마에 팔리는지를 말한다. 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금화를 던진다.밤. 거지 소굴. 에티엔은 쓰러진 성문 아래에서 어린 병사가 손가락을 내민다. 함께 마신 와인 값이다. 병사는 웃는다. 치아가 빠졌다. 명예는 뜨거운 피에 잠겨 있다. 돈은 피보다 오래 간다.궁정 회의. 갑옷은 번쩍이나 심장은 벽돌 같았다. 필리프 왕이 깃발을 세운다. 귀족들이 명예를 말한다. 필요를 말하는 입술은 적다. 에티엔은 침묵한다. 명예는 칼에 묶인 종처럼 흔들린다.멀리 흙길. 굶주린 농부들이 부서진 제분소에 몰려 있다. 에티엔은 창 끝으로 그들을 돌려세운다. 왕의 말굽은 그들의 빵을 으깬다. 그는 헛헛한 속을 움켜쥔다. 기사도의 심장은 서서히 재가 된다.

Part III | The Ridge

Crécy-en-Ponthieu 외곽. 낮은 언덕. 잿빛 포도밭. 말라비틀어진 덩굴이 뼈처럼 휘었다.토마스는 언덕에 내린다. 말뚝이 잣나무처럼 흙에 꽂힌다. 그는 각목을 몽둥이로 두들긴다. 나무결이 갈라지며 진흙이 튄다. 밤새 빗방울이 말굽자국을 채운다.라누초 디 루카. 제노바 석궁의 대장. 그는 진흙 위에 구리를 세어 본다. 동전을 물에 씻어 무게를 잰다. 빛은 잿빛이다. 석궁줄을 조이며 말한다. 값이 맞으면 쏜다. 값이 틀리면 물러난다. 그에게 전쟁은 계산이다.설교자. 검은 수도복. 그는 길섶에 무릎 꿇어 흙을 입에 댄다. 흙은 피맛이다. 그는 독백한다. 신은 돌처럼 침묵하고 인간은 돌 속으로 기어든다.새벽을 앞둔 언덕. 장궁병들은 지평선을 바라본다. 침묵이 깃발 같다. 까마귀가 와서 포도덩굴 위에 앉는다. 울음은 없다. 바람만 분다. 땅이 숨을 죽인다.

Part IV | White Rain

해돋이. 언덕은 회색 물결. 라누초의 제노바 인부들이 전열을 편다. 석궁 노가 삐걱거린다. 첫 살이 나간다. 공기의 막을 찢는다.해가 중천. 하늘이 백지처럼 번다. 토마스가 활을 겨눈다. 장궁은 긴 나무다. 손끝이 떨린다. 흰 깃 화살이 날아간다. 흰 비다. 연속.기병대가 밀려온다. 에티엔이 전방에 선다. 말의 숨결이 김을 토한다. 그는 외친다. 그러나 말굽 소리가 삼켜 버린다. 차가운 비가 떨어진다. 흰 비와 섞인다. 장궁의 비는 끊이지 않는다.석궁병들이 후퇴한다. 라누초는 손가락을 세어 본다. 숫자가 줄었다. 그는 돌아선다. 금화가 바닥을 뒹군다. 가치가 없다. 그는 자리를 뜬다.정오. 비는 진창을 만들었다. 기사는 진흙에 잠긴다. 에티엔은 말 위에서 화살을 맞는다. 깃대 끝이 어깨뼈를 꿴다. 철이 살을 헤집는다. 그는 칼을 빼지만 칼은 허공을 친다. 갑옷이 무거워진다.황혼. 해가 피빛으로 지며 까마귀 그림자 길어진다. 토마스는 활통이 비었음을 본다. 그는 곡식을 타며 올라오는 연기를 본다. 적도 동료도 없다. 그는 숨을 쉰다. 숨 끝에 철 냄새.칠흑. 밤이 언덕을 삼킨다. 횃불 몇 줄기가 흙탕물에 흔들린다. 설교자는 언덕 위에서 무릎 꿇는다. 그는 중얼거린다. 칼이여 잠들라. 인간이여 짐승으로 돌아가라. 별은 구름 뒤다.

Part V | Harvest of the Dead

새벽 빛 잿빛. 안개가 들판을 삼킨다. 바람이 사라졌다.토마스는 활을 내려놓고 시신을 넘는다. 살점과 철편이 한데 엉겼다. 그는 발끝으로 기사 투구를 건드린다. 안에 얼굴이 없다. 흰개미가 든다.에티엔의 말이 쓰러진 옆에 팔이 누워 있다. 방패가 흙에 반쯤 묻혔다. 문장(紋章)의 사자 위에 진흙이 겹겹이 앉았다. 에티엔의 눈은 하늘을 본 채 굳어 있다. 기사도의 문장은 그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라누초는 언덕 아래에서 동전 자루를 뒤집는다. 빈 자루가 바람에 찢어져 나풀거린다. 그는 돌아선다. 동전은 흙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계산이 끝났다. 숫자는 죽음보다 짧았다.설교자는 끊긴 창대를 지팡이 삼아 걷는다. 그는 언덕 아래 해골을 주워 든다. 해골은 물에 젖어 무게가 없다. 그는 속삭인다. 흙은 흙으로. 살은 살로. 피는 비로. 소리는 침묵으로.까마귀 울음. 들판 어딘가에서 누군가 신음한다. 토마스는 그 방향으로 걷다가 멈춘다. 허리까지 진흙이다. 그는 활을 잃었고 칼도 없다. 손을 본다. 손이 떨린다.비가 내린다. 늦은 비. 방패와 시체 위에 떨어진다. 흙탕물이 흡수한다. 금빛 깃발이 찢겨진다. 아무도 세우지 않는다.저녁. 연기와 안개가 섞여 빛이 없다. 들판 구릉이 마치 파도 같다. 파도 위에 뼈가 떠다닌다.토마스는 언덕을 뒤로한다. 남쪽으로 난 길. 런던도 파리도 아닌 길.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 안다. 그것이 의미인지 공허인지 모른다.설교자는 들판 중앙에 독초를 꽂는다. 십자가가 아니다. 목단도 아니다. 그는 돌 하나를 찾아 올려놓는다. 바람 한 점이 와서 돌을 넘기고 간다.밤. 까마귀가 묵은 피를 쪼아 먹는다. 달은 없다. 별이 없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끝나지 않는 숨결이 느껴진다.전쟁이 지나간 자리. 왕도 기사도 상인도 설교도 함께 묻힌 자리. 들판은 다시 밀을 품을 것이다. 밀은 빵이 되고, 빵은 다시 피가 된다.다만 오늘의 흙은 이름 없는 뼈를 품는다. 살과 철이 한 번에 썩어드는 시간. 그 사이 어디에도 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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