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관은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30km를 넘기지 못하는 투수다. 그런 그가 8년 연속 10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칼날 같은 제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제구가 가능했기 때문에 느린 구속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올 시즌엔 대단히 고전했다. 두 차례나 엔트리서 제외되는 등 수모를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10승을 채우기는 했지만 벤치의 믿음은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다.유희관은 2020년 KBO리그에서 27경기(136⅓이닝)에 등판해 10승 11패 평균자책점 5.02 56탈삼진을 기록했다. 두산의 포스트시즌 12경기 중에 딱 한 번만 출전했다. 사진=MK스포츠 DB
평균자책점 5.02는 그가 10승 이상을 거둔 2013년 이후 최악의 성적이다.
결국 한국시리즈서는 공을 던질 수 있는 날 임에도 미출장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팀에서 활용도가 완전히 떨어졌음을 뜻하는 결정이었다.
유희관의 제구력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희관존’이다. 살짝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을 던져 주심의 눈을 속이고 이 공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것이 유희관의 성적을 높여준다는 가설이다.
유희관의 장기는 체인지업이다. 우타자의 바깥쪽을 체인지업으로 공략한 뒤 몸쪽 살짝 빠지는 스트라이크존으로 공을 던져 삼진을 유도하는 것이 주요 패턴으로 꼽혔다.
그렇다면 올 시즌 유희관의 부진은 바로 이 ‘희관존’이 흔들렸기 때문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희관존이 살아나지 않으며 유희관이 부진을 겪었다는 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 유희관은 올 시즌엔 희관 존에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으며 손해를 보게 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과 다르다.자료=스포츠 데이터 에볼루션
유희관은 경기 내용이 좋지 못했을 때 오히려 삼진 비율이 높아지는 투구를 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공을 집어넣는 비율은 떨어졌지만 삼진 비율은 오히려 높았다.자료=스포츠 데이터 에볼루션
워낙 삼진 잡는 비율이 떨어지는 투수지만 어찌 됐건 평균자책점 7점대 이상 경기서 삼진/볼넷 비율이 0.9에서 1.6으로 높아졌다.
7점대 이상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경기서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넣은 공의 비율은 38.7%에서 40.5%로 높아졌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1개 정도 빠진 공의 비율은 16.4%에서 12.7%로 낮아졌다.자료=스포츠 데이터 에볼루션
유희관이 자신의 희관 존을 활용했다면 공이 하나 빠진 공을 던졌을 때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비율이 높았어야 한다.
실제는 달랐다. 유희관이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경기서 공 1개 빠진 존의 공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비율은 25.9%였다. 하지만 7점대 이상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경기서는 26.5%로 소폭 상승했을 뿐이다. 공 1개 차로 희비가 엇갈리는 비율이 눈에 띌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인 이미지대로라면 공 1개가 빠진 공에 대한 스트라이크 콜이 특별히 높아야 한다. 하지만 유희관은 이미지와 달리 제구로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일명 희관 존은 몇 차례 인상적인 기억이 일반화됐을 가능성이 높다. 수치가 이를 증명한다.
스포츠 데이터 에볼루션은 “유희관은 스트라이크존 보더라인에 걸치는 제구를 통해 심판의 스트라이크콜을 받아내는 역량이 탁월한 이른바 ‘희관존’을 잘 활용하는 투수다. 하지만 호투한 경기와 부진한 경기 모두 공 1개 빠진 코스의 판정 스트라이크 비율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희관존'이 호투의 요인이 된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구속과 구위 문제 역시 호투와 부진의 이유가 되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유희관의 평균구속은 129km로 호투를 펼친 7경기와 부진했던 8경기의 패스트볼 평균구속 차이는 1km가 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유희관의 올 시즌 부진은 전체적인 제구력 난조가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몰리는 공이 많아지며 구위가 좋지 못한 유희관이 난타를 허용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자료=스포츠 데이터 에볼루션
7점대 이상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경기서 뚜렷하게 가운데로 몰리는 공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강한 타구를 허용하는 비율도 몰린 공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유희관의 ’희관존‘이 가동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몰린 공이 많아진 것이 부진의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자료=스포츠 데이터 에볼루션
유희관도 다른 투수들과 마찬가지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허용했을 때 안타가 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특히 7점대 이상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경기서 라인드라이브 비율이 2점대에 비해 8%나 높았다.
유희관의 부진 원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투수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올 시즌 제구가 크게 흔들리며 안 좋은 결과를 많이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두산 코칭스태프도 이런 약점이 보였기 때문에 포스트시즌서 유희관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정말 ’희관존‘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다른 결론과 선택도 가능했을 것이다.
유희관은 좋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을 때나 나빴을 때나 존 하나 차이 정도 나는 스트라이크 비율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희관이 잘 던진 경기와 ’희관존‘은 큰 상관이 없었음을 뜻한다. 오히려 안 좋을 때 삼진을 많이 잡으며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더 많은 공을 던지려 했던 것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희관이 부활하기 위해선 운이 아닌 실력이 따라줘야 한다. 스트라이크 존에 우겨넣는 내용의 투구로는 올 시즌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볼의 로케이션에 따른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희관존‘은 실제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었다. 막연하게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유희관은 실력으로 정면 돌파를 하는 수밖에 없다. 장점인 제구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따라 업그레이드가 돼야 한다. 모든 것은 유희관이 하기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