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배구 선수로서 인생은 끝났다. 오지영(36)의 커리어는 구단의 계약 해지라는 오명으로 마무리될 듯하다.
페퍼저축은행 배구단은 27일 공식 채널을 통해 오지영의 계약 해지 소식을 알렸다. 페퍼는 입장문에 "금일 한국배구연맹(KOVO)의 상벌위원회 결과에 따른 구단의 입장이다. 오지영 선수와 계약을 해지하기로 결정했다"라며 "구단은 향후 선수들의 권익 보호와 해당 사건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하겠다. 심려를 끼쳐드려 사과드린다"라고 밝혔다.
배구계 전체를 뒤흔든 중대한 사안이었다. 소속팀도 좌시하지만은 않았다. 페퍼는 "구단 내 불미스러운 일로 페퍼를 아껴주시는 팬들과 KOVO, 배구 관계자분들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라며 "페퍼는 내부조사를 통해 오지영 선수의 인권침해 행위 사실을 파악했다. 곧바로 선수단에서 배제했다. KOVO에 이를 신고했다. 상벌위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라고 알렸다.
소문은 사실이 됐다. '후배 괴롭힘 의혹'에 KOVO는 지난 23일 오전 연맹 회의실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선수에 대한 상벌위를 개최했다. 당시 KOVO는 해당 사안에 대해 사실 여부가 파악되지 않아 "A선수는 상벌위에 직접 출석해 입장을 소명한다. 신고 내용은 확인했다"라고 상벌위 개최 이유를 설명했다. A선수는 오지영으로 밝혀졌고, 구단 관계자와 당사자들의 소명을 종합한 결과 가해자는 중징계를 피해갈 수 없었다.
KOVO는 27일 오전 2차 상벌위를 거친 뒤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KOVO는 오지영 선수의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파악했다. 피해자로 지목된 선수들도 재출석했다. 페퍼 관계자도 소명 기회를 부여했다. 진술을 확인했다"라며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이 필요했다. 그 결과 오지영은 팀 동료에 대해 괴롭힘과 폭언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설명했다. KOVO는 오지영에 자격 정지 1년 징계를 내렸다.사실상 선수 경력이 끝난 셈이다. 오지영 개인의 강압으로 선수단 기강이 무너졌다. 선수 두 명도 퇴단했다. 2023~2024시즌 배구계 최악의 사건으로 불릴만한 일의 중심에 선 오지영이 국내서 새 소속팀을 찾기는 무리일 듯하다. 이미 전성기 나이가 지난 리베로를 해외 구단에서 데려갈지도 미지수다.
KOVO도 공식 발표를 통해 오지영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연맹은 "상벌위는 오지영의 행위들은 중대한 반사회적 행위라 판단했다. 프로스포츠에서 척결되어야 할 악습이다"라며 "유사한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재하겠다. 선수인권보호위원회규정 제10조 제1항 제4호, 상벌규정 제10조 제1항 제1호 및 제5호, 상벌규정 별표1 징계 및 제재금 부과기준(일반) 제11조 제4항 및 제5항에 의거해 오지영의 징계 수위를 결정했다"라고 알렸다.
화려한 경력에 스스로 먹칠을 한 꼴이 됐다. 오지영은 V리그를 대표하는 리베로 중 하나로 통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2006년 드래프트 1라운드 4순위로 구미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현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에 입단한 오지영은 과감한 포지션 변화로 프로 무대 생존을 목표로 했다. 성장을 거듭한 오지영은 2010년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돼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합류했다. 은메달을 목에 걸며 여자배구 역사의 한 편에 자리했다. 2020 도쿄올림픽 멤버로도 활약했다. 한국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세르비아에 셧아웃 패배를 당하며 메달 획득은 실패했다.창단 후 세 번째 시즌을 맞은 페퍼는 구단 내외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2023~2024시즌 전 부임한 조 트린지(37) 감독도 결별이 확정됐다. 페퍼 구단 관계자는 지난 26일 스타뉴스와 통화에서 "트린지 감독은 이미 선수단을 떠났다. 마지막 경기는 지난 한국도로공사전이었다. 선수들도 이를 알고 있다"라며 "트린지 감독과 이별 소식은 곧 공식화될 예정이다. 서류 작업 절차만 남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시즌 초반부터 선장을 잃은 팀이 호성적을 낼 리 만무했다. 페퍼 2대 사령탑 아헨 킴(39) 감독은 지난해 6월 갑작스럽게 퇴단했다. 프로 무대 경험이 없었던 트린지 감독은 급히 페퍼 지휘봉을 잡았다.
2021~2022시즌과 2022~2023시즌을 최하위로 마무리한 페퍼는 2023~2024시즌에도 맥을 못 췄다. 공격과 수비 모두 손 볼 곳이 많았다. 심지어 페퍼는 국가대표 아웃사이드 히터 박정아(31)를 영입하고도 석연찮은 일처리로 선수단 보강에 실패했다. 주전 세터 이고은(30)을 보상 선수로 한국도로공사에 보냈고, 이를 사실상 철회하기 위해 2023~2024시즌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과 주전 미들블로커 최가은(23), 1라운드 지명권을 한국도로공사에 내줬다.미래를 대비할만한 최고 전력도 잃었다. 한국도로공사는 페퍼로부터 받은 1라운드 지명권을 제대로 활용했다. 드래프트 1픽으로 전체 1라운드 1번 김세빈(19)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김세빈은 데뷔 시즌부터 맹활약 중이다. 2023~2024시즌 올스타 팬투표에서 여자부 K스타 미들블로커 전체 2위에 선정되는 등 팬들의 인정도 받고 있다.
게다가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남긴 페퍼다. IBK기업은행과 경기에서 셧아웃 완패를 당하며 21연패 수모를 겪었다. 여자부 단일 시즌 최대 연패 신기록이었다. KGC인삼공사의 종전 여자부 최다 연패(2012~2013시즌, 20연패)를 넘었다. 심지어 페퍼는 이미 2021~2022시즌과 2022~2023시즌에 거쳐 20연패를 기록한 바 있다. 이번에는 단일 시즌 최다 연패 멍에까지 남기게 됐다.
종전 기록을 23까지 늘리게 됐다. 지난해 11월 10일 이후 승리가 없었던 페퍼는 V리그 여자부 종전 최다 연패 기록을 넘었다. 그나마 트린지 감독의 고별 경기가 된 한국도로공사전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승리하며 남자부 단일 시즌 기록인 KEPCO(현 한국전력)의 25연패를 넘지는 않았다.이미 트린지 감독은 선수단 내 문제를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수차례 팀 내 분위기를 저격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4라운드 무렵에는 "팀 내 응집력을 높여야 한다. 기본적인 팀워크를 잡아야 한다. 기술적인 부분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19일 현대건설과 홈 경기에서는 "구체적인 사항은 언급하지 않겠다. 팀원들이 이겨내야 할 문제가 있다. 페퍼는 분명 좋은 팀이나, 신뢰를 기반으로 팀 문화를 쌓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본인도 "방법을 찾겠다"라고 다짐했지만, 끝내 트린지 감독은 한 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페퍼를 떠나게 됐다.
팀 내 분위기를 깨트린 주원인이 나온 듯하다. 오지영의 동료 인권 침해 행위는 참다못한 선수의 퇴단까지 이어졌다. 페퍼는 주전으로 활약했던 오지영을 과감히 쳐내는 결단까지 내렸다.
잔여 경기를 치러도 페퍼는 이미 탈꼴찌가 불가능하다. 트린지 감독 계약해지 후 페퍼는 이경수(45) 수석코치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다음 시즌에는 새 사령탑과 선수단 분위기 전면 쇄신을 통해 반등을 꿈꿀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