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의 2020년 마지막 총회가 열린 15일 리베라호텔. 김현수와 박병호, 허경민 등 KBO리그를 대표하는 10개 구단 대표선수 30명은 최근 제10대 회장으로 선출된 양의지의 주재 아래 각종 현안을 꼼꼼히 짚었다.
말 그대로 마라톤 회의였다. 두 차례 정회 속에서 선수들은 3시간을 훌쩍 넘기며 열띤 논의를 펼쳤다.
오후 1시경 시작한 총회는 오후 4시가 다가오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활짝 열렸다. 회의가 모두 끝났다고 판단한 취재진이 총회장 문 앞으로 다가서려는 순간. 선수협 관계자가 잠시 양해를 구했다. 취재진이나 선수협 임직원들 없이 선수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다며 아직 총회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선수협은 이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마라톤 회의를 벌였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각종 내부 문제로 홍역을 치른 뒤였기 때문이다. 전임 이대호 회장과 김태현 사무총장의 판공비 논란이 불거졌고, 회계와 관련해서도 크고 작은 사안들이 도마 위로 올랐다.
이 과정에선, 선수들 스스로가 선수협을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왔다. 누구도 선수협회장을 맡지 않으려고 하고, 또 정작 도움이 절실한 저연차와 신예급 선수들이 외면받으면서 선수협이 힘을 잃게 됐다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결국 양의지 신임 회장 체제의 선수협은 스스로 힘을 기르는 방법을 택했다. 양의지는 이날 총회에서 부회장 3명을 임명했다. 2006년 자신과 함께 프로로 뛰어든 김현수와 이재원, 황재균을 우군으로 삼기로 했다. 선수협 정관에는 부회장직이 없지만, 추후 정관 개정을 통해서라도 이들을 부회장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총회 후 만난 양의지는 “선수협이 힘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회장을 도울 부회장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배경을 밝혔다.나머지 선수들이 이날 보인 자세도 사뭇 달랐다. 이는 총회 말미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선수들의 자체 미팅을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라도 선수협의 진짜 주인들이 주도적으로 나서보겠다는 분위기가 읽혔다.
이날 총회를 지킨 한 선수는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선수들끼리 ‘앞으로는 선수협과 관련된 사안을 더 꼼꼼히 챙기자’고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수 역시 “우리가 외면하면 이러한 논란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많은 선수들이 생각하는 분위기였다”면서 “그런 점에서 우선은 양의지 회장에게 힘을 더 실어주자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3명의 부회장들이 새로 임명된 만큼 선수협이 앞으로는 선수들의 힘 있는 목소리가 반영되는 조직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