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MLB) 투수들의 구속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꿈의 영역으로 불렸던 시속 100마일(161㎞)을 던지는 투수들은 요즘은 매일 나온다. 인플레이타구를 줄여 아예 불운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래서 탈삼진 제조 능력이 관심을 모으는 시대다.
이런 능력은 갖추지 못한 선수는 점점 더 살아남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괴짜 투수'이자, 2009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인 잭 그레인키(39‧캔자스시티)는 이런 트렌드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굳이 빠른 구속과 탈삼진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정상급 투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는 메이저리그 통계학자들의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메이저리그 탈삼진 비율은 2014년 처음으로 20% 벽을 돌파한 이후 매년 높아지고 있다. 올해는 22.7%다. 5년 연속 22%를 웃돈다. 그런데 그레인키의 올해 탈삼진 비율은 보잘 것이 없다. 평균 정도였던 탈삼진 비율은 올해 7.5%까지 떨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규정이닝을 소화한 선수 중 탈삼진 비율이 10% 미만인 선수는 그레인키가 유일하다. 뒤에서 두 번째인 잭 플래삭의 13.9%와도 큰 차이가 난다.
구속도 빠르지 않다. 그레인키의 올해 포심패스트볼 평균구속은 88.4마일(약 142.3㎞)에 불과하다. 탈삼진 능력은 메이저리그 하위 1%, 헛스윙 비율도 하위 1%, 포심 구속도 하위 6%다. 메이저리그에서 80마일 중후반대의 공은 오히려 100마일의 강속구보다 더 경험하기 어려운 아리랑볼이다.
그러나 그레인키는 9일(한국시간)까지 6경기에서 33⅔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2.67을 기록 중이다. 승운이 따르지 않아 아직 무승 2패에 머물고 있지만, 그레인키는 영리한 두뇌 피칭과 정교한 제구를 앞세워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상대 타자의 허를 찌르다 못해 농락하는 듯한 볼 배합과 이를 뒷받침하는 커맨드는 그레인키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에 따르면 그레인키는 8일까지 '평균자책점 3.00 이하, 이닝당출루허용수 1.00 이하, 그리고 탈삼진 비율 6.6% 이하'인 역대 11번째 선수가 됐다. 1970~1980년대까지는 간간히 나오던 기록이었지만, 1994년 리키 본스 이후로는 아무도 해당자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이 정도 탈삼진 비율로 이만한 성적을 거두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레인키는 현대 야구의 확실한 돌연변이다. MLB.com은 "현재 세상에 이런 투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포수로 빅리그에서 13년을 보냈고 현재 캔자스시티의 감독을 맡고 있는 마이크 매시니는 MLB.com과 인터뷰에서 "삼진을 잘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많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시대"라면서도 "하지만 피칭은 피칭"이라면서 그레인키가 자신이 가진 정보를 가장 잘 실천에 옮기는 선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 그레인키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잘 잡는 선수고, 유리한 카운트에서 느린 공으로도 상대를 몰아붙이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레인키는 현재 메이저리그 통산 219승을 거두고 있다. 현역 선수로는 저스틴 벌랜더(휴스턴‧229승)와 1‧2위를 달리고 있다. 벌랜더가 여전히 힘을 바탕으로 한 파워피칭을 선보인다면, 그레인키는 노련한 피칭으로 새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강속구만큼이나 따라하기 어려운 그레인키의 노련한 투구에 관심이 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