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 에르난데스가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 있는 트레이닝센터에서 스타뉴스와 인터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이상희 통신원[피닉스(미국 애리조나주)=이상희 통신원] 보스턴의 유틸리티 플레이어 엔리케 에르난데스(31)는 본명보다 별명인 '키케'로 더 자주 불힌다. 그는 2009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6라운드에 휴스턴의 지명을 받았다. 당시 그가 받은 계약금은 15만 달러(약 1억 8262만원). 금액이 말해주듯 에르난데스는 입단 초기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휴스턴 산하 마이너리그 유망주 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스타뉴스와 만난 그는 "오히려 그런 점이 나를 프로 입단 후 더 열심히 노력하게 만들었다"며 "하위 라운드 지명과 무관심이 차라리 동기부여가 됐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마이너리그에서 꾸준히 성장하던 에르난데스는 2014년 7월 1일(미국시간) 빅리그로 콜업돼 같은 날 시애틀을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첫 경기에서 2루타 포함 2안타를 기록한 에르난데스는 다음날 경기에선 자신의 첫 빅리그 홈런을 치며 장타력도 과시했다. 메이저리그 루키의 인상적인 활약이었다.
하지만 휴스턴과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7월 말 에르난데스는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LA 다저스로 또 한 번 이적하며 1년 사이 세 번째 유니폼을 입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다저스 유니폼은 에르난데스가 빅리그에 안착하게 된 계기는 물론 자신의 다양한 장점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슈퍼스타가 즐비한 다저스에서 에르난데스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내야와 외야 수비가 모두 가능하며 주력도 좋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필요할 때 한 방씩 터트려주는 장타력도 있었다.
2015년 백업선수로 76경기에 출전한 그는 타율 0.307, 7홈런 22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가치를 성적으로 입증했다. 2016년과 2017년 잠시 주춤했으나 2018년 다저스 시절 가장 많은 145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0.256, 21홈런 52타점을 올렸다. 커리어 하이였다.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한 OPS도 준수하다는 8할(0.806)을 넘었다.
2020 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취득한 에르난데스는 보스턴과 2년 총액 1400만 달러(약 170억 4500만원) 계약을 체결하며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자신의 장점을 실력으로 입증하며 정글 같은 메이저리그 경쟁에서 살아남은 결과였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이 잘된 케이스였다.
보스턴으로 이적한 2021년에도 에르난데스는 내야와 외야를 넘나들며 타율 0.250, 20홈런 60타점의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소속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견인했다. 특히 탬파베이와 맞붙은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ALDS) 2차전에서 5안타 경기를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3차전에서도 에르난데스는 '안타-안타-홈런'을 치며 보스턴 선수로는 최초로 포스트시즌 7연타석 안타 기록을 세웠다. 한 마디로 ALDS를 지배한 셈이다.
다음은 에르난데스와 일문일답.
- 6살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 처음 시작한 건 4세 때였다. 아버지가 나를 여름 캠프에서 운영하는 야구리그에 데려갔다. 다음날 '재미있냐'고 물어보는 아버지에게 '너무 더워서 하기 싫다'고 말했다. 하하.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6살 때 내가 다시 하고 싶다고 해서 그 뒤로 꾸준히 야구를 하게 됐다.
- 아버지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라는 기사를 봤다.
▶ 그렇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피츠버그 구단 스카우트로 8년 또는 그 이상 일한 것 같다. 매년 이맘때 계약연장을 하는데 현재 메이저리그가 직장폐쇄 상태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 야구를 시작한 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 다수의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는데 나는 조금 다르다.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왜냐면 늘 머리 속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는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그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메이저리그 데뷔나 월드시리즈 우승도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순간이긴 하다.
- 6라운드 지명에 계약금도 많이 못 받았지만 빅리그서 성공했다. 비결이 있다면.
▶ 비결이 있다면 참고 열심히 했다는 점을 꼽고 싶다. 지적했다시피 나는 계약금도 많이 못 받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나를 더 열심히 노력하게 만들었다. 상위라운드에 지명되고 계약금을 많이 받은 선수들 중에는 열심히 할 필요성을 못 느껴 도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나는 휴스턴에 지명된 후 유망주 리스트에 오르지도 못했고,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나를 더 열심히 하고, 강하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됐다.
- 야구를 하면서 징크스가 있는지.
▶ 있는 편이다. 예를 들자면 지난 시즌에 방망이가 아주 잘 맞았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잘한 경기 때 신은 양말이나 속옷을 다음 경기 때도 그대로 챙겨 입는다.(웃음) 그러다 경기가 잘 안 풀리면 또 다른 징크스를 찾아 슬럼프를 벗어나려고 한다.
LA 다저스 시절 에르난데스의 모습. /사진=이상희 통신원- 다저스에서 류현진(35·토론토)과 5시즌을 함께 뛰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하다.
▶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없다. 내가 다저스에서 뛰기 시작한 2015년 류(현진)는 선수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중요한 어깨 수술을 했다. 당시 동료들 사이에서 류가 과거처럼 좋은 공을 다시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어깨 수술 후 마운드에 다시 섰을 때 제구나 구속 등 류가 고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동료로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토론토와 대형 계약을 했을 때는 진심으로 기뻤다.
- 하지만 이젠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맞상대하는 사이가 됐다.
▶ (웃음) 그렇다. 그래도 과거 동료를 같은 리그에서 자주 볼 수 있어 좋다. 우리 둘 사이에 언어장벽이 있어 많은 이야기나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지만 류(현진)는 항상 웃으며 대할 수 있는 좋은 동료이자 훌륭한 투수다. 또한 그가 한국에서 유명인사라는 것도 안다. 가끔은 그런 걸 갖고 류를 놀리거나 장난도 친다. 하하.
- 보스턴과 2년 계약의 마지막 해다. 특별한 시즌 목표가 있는지 궁금하다.
▶ 물론 있다. 수치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해야 한다. 건강해야 목표를 좇을 수 있고, 이룰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목표로는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되고 싶다. 과거 월드시리즈와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다수의 큰 무대는 경험해 봤지만 올스타 경기는 한 번도 뛰지 못했다. 내가 올스타가 된다면 과거 후보였던 내가 주전선수가 된 것처럼 나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 이들에게 또 한 번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끝으로 한국에 있는 팬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 시공간을 초월해 나와 메이저리그에 보내주는 한국 팬들의 사랑과 성원에 감사 드린다. 가끔 한국에 있는 팬들로부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메시지를 받는데 정말 고맙고 특별한 경험이다. 다시 한 번 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